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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이론

Donald W.Winnicott(1896-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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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거듭남 작성일06-04-16 21:00 조회5,5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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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날드 우즈 위니캇은 1896년에 영국의 영국 국교를 믿지 않는 전통이 강한 플리머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시민 작업civic work으로 기사작위를 받았고 그의 아들이 항상 공동체를 중시하도록 길렀다. 다윈에 대한 관심으로 위니캇은 켐브리지에서 생물학을 공부했다. 이후에 그는 의학을 공부했고 그 후에는 소아과를 공부했다. Paddingto Green 병원에서 40년간 소아과를 지휘하면서, 그는 계속적으로 어머니와 아기들에 대한 실질적 고려들에 접근했다. 이것은 그의 뛰어난 상상력에 자극으로 그리고 균형을 맞추는 힘으로 작용했다. 위니캇은 James Strachey와 자신의 첫 번째 분석을 시작해 10년간 지속했다; 그 다음에는 Joam Riviere와 또 다른 짧은 분석을 거쳤다. 1930년대에 그는 자신이 가장 위대한 선생님이라고 간주했고 프로이드 이후에 가장 생산적인 정신분석가라고 여겼던 멜라니 클라인과 광범위한 슈퍼비전 경험을 가졌다.
그러나 전쟁 중에, 영국 정신분석 협회에 클라인의 추종자들과 안나 프로이드의 추종자들 사이에 갈등이 있는 동안 위니캇은 독립된 노선을 걸었다. 클라인과의 투쟁은 유용한 토론으로부터 비-클라인 학파를 배제한다고 그가 느꼈던 투사적 동일시와 시기심 같은 클라인의 용어를 기괴하게 사용하는데 대한 그의 반대에 관한 것이었다. 위니캇이 아동 발달에 있어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 또한 클라인이 본성을 강조하는 것과 충돌했다.
소아과 의사로서 그리고 아동 분석가로서 활동하면서, 위니캇은 다소 정서장애가 있는 성인 환자도 치료했다. 이 작업은 종종 그가 "의존으로 퇴행"(프로이드에서 발견되지 않는 퇴행 개념)을 가진 정서장애 환자의 "관리의 국면phase of management"이라고 그가 부른 것을 설명했다. 이런 환자들은 분석 작업이 일어나기 전에 해석적 작업보다는 안정된 "안아주기"(감정적인 의미에서)를 요구했다(비록 드문 경우지만 그는 실제로 환자의 손을 잡았다). 이 작업을 통해 위니캇은 충돌을 해석해주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기능과는 동떨어진 자신의 행동의 중요성을 보게 되었다. 이것은 초기 아동 발달에서 실제 어머니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신념을 강화했다. 방대하고 광범위한 연구를 통해, 그는 신생아에 대한 어머니의 마음 상태에서 시작하여(일차적 모성 몰두) 처음에는 어머니가 완벽하게 유아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으나 점차적으로 유아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어머니가 유아의 욕구를 채워줄 수 없는 것에 의해 강화되는 전능감에 대한 아동의 환상을 강조하는 초기 유아 발달에 대한 내적으로 응집력 있고 강력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위니캇의 책에 아버지의 중요성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그는 어머니에 대한 초기 관계로부터 문제가 기인된 환자들에 대해 주로 썼다.
위니캇은 중간대상이라는 개념과 그에 수반한 아이디어들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아동이 좋아하고, 아동에게 안정을 주는 장난감을 환경적 준비(provision)로 전능감이 방해되는 순간에 사용한다는 것을 보았다. 그 아동은 바로 그 순간에 완벽한 대상을 "창조할" 필요를 느끼는데, 그 대상은 환경에 있는 누군가에 의해 제공된다. 이런 외적 그리고 내적 교차점은 위안과 역설의 "장소"이다. 아동은 그가 그런 대상을 창조하라거나 찾으라고 요구되지 않는다. 놀이와 모든 인간 문화 경험을 포함하는 창조적 삶의 세계 안에서, 같은 역설이 일어난다. 위니캇은 비록 인간들이 우주의 무관심(indifference)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발달하지만, "내가 아닌" 세상, 그리고 내적 외적 현실을 분리하는 긴장이 유지될 필요가 없는 휴식의 순간 또한 필요로 한다고 믿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비행청소년들과의 위니컷의 작업은 "반사회적 경향"이라고 그가 불렀던 것에 대한 인식을 확장시켰다. 그는 첫 번째 반사회적 행동들의 가치를 자신에게 옳았던 것 즉, 믿을 수 있었던 부모에게 속임을 당했다는 아동의 느낌에 대한 증거로 보았다. 위니캇은 정상적 초기 양육이 삶의 둘째 셋째 해에 방해가 된 아동들 사이에서 그 경향의 기원을 추적하는 것이 가능했다.
참자기와 거짓자기에 대한 위니컷의 아이디어는 아동 발달에 있어 초기 환경 박탈의 영향을 관찰한 것으로부터 나온 이슈이다. 참자기는 아동의 자발적인 몸짓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괜찮은 어머니에 의한 수용과 보살핌의 환경 안에서 발달한다. 이 과정에서 방해는 고유하고 자발적인 것으로부터 아동을 철수하도록 만든다. 아동은 진짜로 통용되는 거짓자기로 적대적인 세상에 반응한다. 그런 성격 착란(derangements)안에서 수많은 단계적 변화들이 임상 작업에 명백하다.
위니캇의 마지막 논문 중 하나인 "대상의 사용(The Use of an Object)"에서 구체화된 아이디어들은 오직 점차적으로만 수용되었다. 그의 일생동안의 걱정은 현실의 본질에 관한 것이었고, 이 논문에서 그는 모든 관계의 특징인 공격적 욕동이 계속적으로 현실을 창조한다고 이론화했다. 그것의 계속적인 파괴에서 생존함에 의해 그 대상은 "유용"하게 된다. 이 말은 부분 대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꽤 대조적으로, 이것은 대상관계의 가장 나중의 발달을 나타낸다.
위니캇 이론의 범위와 적합성은 그의 collection Therapeutic Consultations in Child Psychoatry(1917b)에서 가장 설득력 있게 제시되어져 있다. 종종 스퀴글 게임을 사용하는 아동과의 짧은 상호작용 안에서, 그와 환자는 번갈아 그림을 그린다. 위니캇은 스쳐 지나가는 대화(passing communication)의 적절함을 간파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발달의 재개를 촉진시킬 수 있는 개입들을 어떻게 그것들로부터 만들어 낼 수 있는지 보여준다. 어린 소녀에 대한 그의 연구, The Piggel(1977)은 어떻게 그가 분석이 "요구"했던 간결한 해석(abbreviated version)을 통해 효과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했는지를 보여준다.
위니캇의 영향은 1971년 그가 죽은 이후에도 꾸준히 증가했다. 정신분석 이론과 실제에 있어 그의 상상력 있는 기여는 엄격한 작업(그것의 주요 도구는 침묵과 주의 깊은 관찰의 맥락 안에서의 해석이었다)으로써 정신분석의 대표주자로 남아있는 오랜 경력의 배경에 서있다.

1. 통합됨과 통합되지 않음.

초기의 자아는 아직 통합되지 않은 상태. 통합되어짐으로 비로소 온전한 자아가 됨. 초기자아는 유전으로 받은 잠재력의 상태. “존재의 계속성”을 경험하는 것을 통해 비로소 이 자아는 하나의 통합된 단위체 - “나는 ··· 이다”(I am) 상태를 획득하며. 초기에 일종의 운동성과 감각의 요소들의 뭉치이다. 이 뭉치가 존재한다는 감각을 획득하고자 하는 경향성을 지니고. 자아의 핵 요소들이 모여서 “나는 ··· 이다” 상태를 성취한다. 무엇보다 자아는 안전한 환경을 제공받음을 통해서 “통합되지 않은 상태”의 경험을 통해 점진적으로 통합에로 나아감. 이 통합되지 않은 상태의 경험은 성인의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능력. 결과에 상관치 않을 수 있는 능력, 고독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의 기초가 된다.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the capacity to be alone)의 기초. - 성숙의 조건. 실제로 혼자 있음이 아니라 누군가가 있는 상태에서 말하는 것이다. 아기의 존재를 방해하지 않고 무엇을 요구치 않으면서 같이 있어주는 상태에서 스스로의 놀이에 심취할 수 있는 능력이며. 이 때 엄마의 안아 주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2. 몸과 정신의 통합
초기에 몸과 정신을 연결해 주는 것은 운동성(motor)과 감각(sensorium)의 역할이다. 이것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 한계선이 막연하게 있다. 차츰 피부의 표면을 둘러싼 일종의 막이 형성되면서 “나”와 “나-아닌” 사이를 구분하게 됨. 비로소 안과 밖을 가지며 자신의 몸의 윤곽을 획득. 정신과 몸의 온전한 결합이 이루어진다. 이것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달과정을 통한 성취임. 즉 초기의 미숙한 정신은 비록 그것이 몸의 기능에 기초해 있더라도 몸에 밀접하게 매여 있지는 않다. 그리고 몸과 정신의 결합의 성취 이후에도 때때로 정신이 몸의 연결을 상실하는 순간들이 있다. 잘 넘어지는 아이, 구덩이에 잘 빠지는 아이. 현기증, 멀미, 신체정신증상 등.
이 과제를 위해 엄마의 아기 다루기(handling)가 중요하다. 함부로 흔들어 대거나 머리를 떨어뜨리거나 잠이 깨지 않은 상태에서 번쩍 들어 올리거나 하는 행위는 치명적이다. 자신의 감정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 자신에 대한 생생한 느낌의 기초.

3. 초기대상관계와 전능경험
대상관계를 가능케 하는 환경의 요인 중요. 아기의 욕구를 적응적으로 충족시켜 줌으로서 환상경험. 그의 욕구가 즉각적으로 채워질 때 “이게 바로 내가 필요한 거야” 라는 경험을 하고 이 경험이 반복될 때 “내가 이것을 창조했다” 라는 경험으로 전환. 여기에서 환상과 실재가 하나가 되고 아기는 세상을 창조한 창조자가 된다. 여기에서 주관적 세계가 창조되고 주관적 세계가 창조되고 주관적 대상이 창조된다. 초기의 대상은 주관적 대상(subjective object)이며 이 주관적 대상이 차츰 보다 객관적 대상(objective object)으로 발달해 나가는 것이 자연스런 성장과정이다.
그러나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 처음부터 환상이 실재의 경험에 의해서 깨어지는 경험은 주체성, 진정성, 창조성, 환상력을 상실한 죽은 대상과의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 과제의 성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아기의 욕구에 반응(respond)해 주는 엄마의 대상제공(object presenting) 된다. 엄마의 행함(doing) 보다 반응(responding)이 중요. 반응해 주지 못하고 행동하는 엄마의 행동은 아기의 존재의 계속성을 깨뜨리는 침범이며 아기는 이에 대해 나쁘게 반응(react)하는 것이 된다. (예: 먹고 싶지 않은 아이에게 강제로 먹이려 하거나 졸리운 아기에게 자극을 주는 행동) 아기의 이니셔티브를 존중해 줄줄 아는 엄마의 지혜. 장난감을 손에 쥐어주는 엄마 보다 찾을 만 한 거리에 놓아주는 엄마. 젖을 입에 넣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입 가까이 대어주는 지혜가 충분히 좋은 엄마이다.

4. 침범과 심리적 상처
어린 자아는 엄마의 자아지원(ego support)을 받음으로써 환경 속에서 안전하게 존재. 이 지원과 보호가 결핍될 때 환경은 아기를 침범하며 아기는 이에 대해 반응(react)한다. 예: 큰 소음, 아기를 돌보는 기술의 반복적인 변화, 고개를 떨어뜨리거나, 털썩 내려놓는 행위 등. 이러한 침범경험의 누적은 정신의 안정성에 피해를 가져다주며. 이 때 아기는 자기멸절의 위협을 느낀다. 이것은 엄청난 불안의 경험 되며. 산산조각이 나는 느낌, 영원히 떨어지는 느낌, 몸과의 관련을 잃어버린 느낌, 방향을 잃어버린 느낌, 의사소통이 완전히 차단된 완전 고립감 등이 생긴다. 아기의 자기표현에 대해 반영해 주지 못할 때 아기의 참자기는 벽에 부딪친 느낌. 아기의 자기표현에 대해 무의식적인 멸시의 감정의 표현. 쏘는 화살. 자기애적 욕구를 가진 엄마는 아기의 참자기를 침범하게 된다.

5. 자기방어
유아의 인격성장은 돌보는 사람의 감수성과 그의 성숙성에 의존돼 있다. 정신병은 근본적으로 “환경 결핍증세”(environmental deficiency disease)로써 엄청난 불안의 상처에 대한 방어체제이며. 그 안에는 통합되지 못하고 떨어져 나간 인격의 핵 요소들이 연약한 상태로, 숨은 상태로, 또는 자라지 못한 상태로 있으며 이 미숙하고 약한 요소들을 껍데기가 둘러싸고 있다.
1) 분리, 의식으로부터 떨어져 나감.
2) 돌보는 자기(caretaker self)로서의 거짓자기 구성이 일어남.
그 정도에 따라  1) 분열증 또는 자폐증
                2) 잠재적 분열증
                3) 분열적 성격
엄청난 불안의 느낌은 미래에 대한 느낌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경험에 대한 느낌이다.

6. 거짓자기
초기 발달에 대한 위니캇의 견해 안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개념이다. 참자기는 아동의 "핵심(kernel)"을 구성하는 "내재한 잠재력"이다. 이것의 계속적인 발달과 확립은 건강한 환경을 제공하고 아주 어린 유아의 감각운동, 태도 자기(postural self)에 의미 있는 반응을 해주는 충분히 좋은 어머니(good enough mother)에 의해 촉진된다. 충분히 좋은 엄마는 또한 일단 욕동이 기능 조직으로써 조직되면 적합한 원초아 만족을 제공해준다. 아동이 자신의 사적 현실감에 의해 권한을 부여받게(authorized)된 핵심 자기로부터 표현적 삶을 낳게 하면서, 참자기는 아동의 존재의 연속성을 지지하는 모성적 보살핌을 통해 그것의 특징(idiom)을 전개한다. 위니캇은 참자기를 원초아의 자발적 표상에 가까운 것으로 보았고 참자기 표현은 본능적 표상으로써 현상학적으로 단명短命(phenomenological ephemerality)을 가진다고 보았다. 거짓자기는, 자아처럼, 안정적이고 되풀이되고, 계속적으로 활동하는 구조이다. 위니캇은 어떤 개인은 거짓자기 장애로 고통을 받는다고 이해했다―정신분열적 성격을 보는 특정한 방법으로―그러나 그는 반복적으로 자기를 참자기와 거짓자기로 구분하는 것 또한 정상이라고 반복적으로 말했다. 참과 거짓은 따라서 도덕적인 질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특질을 말하는 것이다―자발적 표현(참자기) 또는 반응적 삶(거짓자기)을 말한다.
참자기는 아기의 전능환상의 경험에서부터 출발한다. 주관적인 창조경험에서부터 창조적 자기 태동. 전능환상이 깨어지고 창조적 몸짓이 무반응의 벽에 부딪칠 때 참자기는 숨고 대신 거짓자기 발달된다. 또는 침범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방어체제로서의 거짓자기 발달한다. 이는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고, 순응함으로써 참자기를 숨기고자 하는 것이다. 진정한 감정 상실이 뒤따르며. 동조(compliance)의 능력만 발달. 헛된 느낌, 가짜라는 느낌, 등이 지배적이 된다. 이는 본래 엄마가 그 역할을 감당치 못함으로 아기 스스로가 엄마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엄마의 역할을 감당해 줄 때에만 비로소 거짓자기를 포기하게 된다. 진정한 자기 정체성 대신 수없이 많은 거짓 정체성을 지니게 되고. 참다운 존재 대신(true being) 거짓된 존재(false being), 즉 허무의 세력이 그 안에 자리 잡음으로써 비인격적인 세력이 활성화 되며, 또는 “나-아닌”세력의 포로가 된다. 집단 또는 군중심리에 사로잡히거나 극단적인 파괴적 세력에 휩쓸리게 된다. 왜냐 하면 극단적 파괴 행동 속에서 비로소 자기 존재의 진짜임(real)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생생한 자기감정을 거기에서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거짓자기는 참자기의 부재 또는 일반적으로 정신분열 개인에게 있는 숨겨지고, 비밀스런 참자기를 가리킨다. 만약 보호자가 감각 운동적, 몸짓, 유아의 "원초아" 자기, 그리고 자신을 강제하는, 있는 대로 반영해주지 않고 자기에 열중한(self-involved) 어머니가 느끼는 것에 반영한다면 유아에게 거짓자기가 형성된다. 통각이 지각을 이기게 된다.
모든 개인은 어느 정도 거짓자기 구조로 구성되고 그에 일치하는 사회적 자기를 가진다. 이 스펙트럼의 다른 끝은 Helene Deutsch(1942)가 "마치…같은" 성격이라고 묘사했던 것과 일치하는 거짓자기를 본질적으로 작동시키는 사람이다. 지성화는 종종 거짓자기와 연합된다.


7. 지적능력과 거짓자기
지적능력이 거짓자기의 자리가 될 수 있다. 엄마가 아기를 이해해 주지 못함으로써 아기 스스로가 엄마를 돕기 위해 자신의 지적능력을 조급하게 발달시키기 시작한다. 조숙한 아이. 아기는 이해 능력을 발달시킴을 통해서 스스로 자신의 엄마의 역할을 감당코자 한다. 지적으로는 우수하나 인성에 결함을 가지는 경우, 대개 그 지적능력이 거짓자기의 자리가 되는 것이다.

8. 박해에의 기대
최초의 “나는 ~ 이다” 순간은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그 때 다른 모든 것은 “나-아닌” 것으로 경험되기 때문. 자기의 주장은 순간적으로 나 아닌 모든 것들로부터의 박해에 노출되는 경험이다. 이 때 아기는 무엇보다도 안전하게 감싸주는 환경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가 팔로 감싸줄 때 아기의 “나는 ~ 이다” 순간은 그 모험을 감당하고 견딜 수 있다. 그렇지 못할 때 이 “나는 ~ 이다”의 주체인 참자기는 그 박해의 위협을 견디지 못하고 숨어버리고 만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말은 바로 “나는 ~ 이다” 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을 할 수 있는 사람만이 참다운 성인이라고 할 수 있다.

9. 환상과 현실원리(Reality principle)
현실원리는 세상존재(existence of the world)의 사실로서 아기 스스로의 창조와는 상관이 없는 사실을 말한다. 이것은 자발성, 창조성, 그리고 생생한 삶의 느낌(sense of Real)들의 가장 큰 적이다. “현실원리란 모욕이다”
성숙이란 나의 세계를 버리고 나-아닌 세계(not me world)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현실원리의 모욕을 감당하고 환상과 현실 사이의 틈을 연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생의 출발에 있어서 환상, 전능환상의 경험은 현실원리의 모욕으로부터 아기를 보호한다. 생의 아주 초기부터 엄마와 아기 사이에 어떤 활동과 감각이 작용하는 데 바로 이 공간에서 환상과 실재가 만나고 전능이 경험된다. 이 공간이 바로 삶(living)의 공간이고 삶을 즐기는 경험의 공간임. 이 공간이 깨어질 때 모방과 동조에 의한 자기의 배신(betrayal of the self)이 이루어진다.


    10. 충분히 좋은 엄마 (good enough mother)
전적으로 어머니에게 의존적인 유아를 위한 최적량의 항상성(constancy)과 위로를 주고 안아주는 환경을 제공해주는 어머니를 뜻한다. 그런 어머니는 아기의 공생적 필요를 충족시켜주고, 그러면서 아기가 "몸짓(gestural)" 신체 자기를 형성하는 것을 돕고 진심 어리고 활동적인 방법으로 대상을 사랑할 근본을 제공해준다. 그녀는 자신에게 적절한 시간이나 필요를 강요하는 대신에 아이에게 "적합한 시간"에 아이가 원하는 것을 제공한다. 그리고, 유아가 좌절, 공격성, 상실을 경험할 때, 그녀(어머니)는 또한 계속적인 기본적 감정이입과 안아주기의 환경 안에서 아이에게 지지를 제공한다. 이런 특질은 어머니가 유아의 전능한 욕구를 공공연히 도전하지 않고, 유아의 전능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유아는 주관적인 존재감, 표현, 창조성을 위한 인간적 내용을 습득하게 된다.
어머니는 자신의 사적이고 자연스런 모성감에 따라 "충분히 좋아"지게 되는데, 위니캇은 이 자발적인 과정이 좋은 어머니가 되기 위한 안내서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곧, 유아에 대한 어머니의 적응은 감소한다. 그녀의 실패는 점차적으로 그 아동에게 자신이 전능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준다―어머니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 대처할 능력이 없는 유아의 정신신체 발달이 이루어짐에 따라, 유아는 전능감의 경험을 상실하게 되지만, 반면에 그는 모험심을 얻고 대상 세계에 대해 분리된 공격성을 사용한다.

      11. 안아주기 (holding)
의존적인 유아가 필요로 하는 촉진적 환경을 만들어주는 모성적 보살핌. 안아주기는 충분히 좋은 어머니의 지속적인 보살핌과 자연스런 기술을 말한다. 이런 안아주기를 통해 유아는 위니캇이 건강한 아동 발달의 핵심적이고 일반적인 특징으로 간주하던 전능함을 경험한다. 이것은 당분간 유아에게 안아주기가 상실되었을 때 그 결과로 일어나는 분노와 공포에 대한 불가피한 감정이입의 실패를 유아가 참을 수 있게 하는 충분한 안전성을 제공한다. 안아주기 또는 환경적 어머니는 위니캇의 대상어머니 즉, 유아의 대상관계와 자아 조직이 충분히 발달되었을 때 양쪽 부분에 대상을 향한 원초아 만족을 제공해 주는 어머니와는 다르다. 안아주는 환경은 이런 후기 단계와 불가피하게 따라오게 되는 분리 경험에 유아를 준비시켜야만 한다.
안아주는 환경의 개념은 분석가와 분석적 환경에 의해 제공되는 일반적, 지지적 연속성을 개념화하기 위해 위니캇, Modell,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정기적 방문, 오고 가는 의식, 근원적인 감정이입, 변하지 않는 목소리, 그리고 분석실의 대상, 공간, 구조의 연속성 모두는 의미 있는 치료시간 동안에 일어나는 붕괴(disruption)를 담도록 도와주는 은유적 안아주기에 기여한다.

    12. 놀이 (playing)
위니캇은 Schiller, Groos, Rank, Hutzinga, Callois, Bruner같이 놀이를 창조적 과정과 연관지은 사람들의 전통을 따랐다. 자유로운 놀이(그리고 규칙이 지배적이지 않은 게임)는 은유적 잠재적 공간 안에서 창조되어지고 놀이된 중간대상과 현상의 파생물인 장난감이나 인형의 사용을 통해 젖먹이 유아와 어머니 사이의 대화를 확장한다. 따라서 위니캇은 놀이라는 용어를 점진적, 창조적, 발달적 의미로 사용했다. 참자기(유아의 타고난 성향)가 자발적인 몸짓을 통해 전개됨에 따라, 놀이는 이 참자기의 표현과 그것을 정교하게 하기 위한 매개체가 된다.
놀이는 아동기의 "작업"이고 어느 정도 이것은 심리치료의 작업이 된다. 이상적으로, 최소의 리비도 적이거나 공격적인 에너지를 투자하는 것은 자아 활동이다. 놀이는 아기와 어머니 사이에 있는 잠재적 공간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치료사와 환자 사이에도 일어난다. 만약 심리치료가 두 영역(환자와 치료사의 놀이)이 중복되는 곳에서 일어만다면, 환자의 참자기의 표현(articulation)을 촉진시키기 위해, 자유 연상과 분석적 해석은 두 가지 주관적 놀이를 구성한다. ludic(놀이) 상징과 oneiric(꿈) 상징간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런 놀이의 개념은 쉽게 언어 발달로 확장되고 언어유희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13. 잠재적 공간 (potential space)
유아와 어머니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 창조적인 가설적 공간. 예를 들어, 어머니는 적합한 시기에 유아에게 어떤 대상을 소개하면, 유아가 자신의 주관적 개성(idiom)을 표현하기 위해 그 대상을 사용할 수 있고 또 대상의 독립적 특질을 취하는 것을 강화할 수도 있다. 유아와 어머니 사이에 있는 공간은 오직 잠재적 공간이고, 이것의 유용성은 충분히 좋은 모성적 보살핌에 달려있다. 일단 확립되고 사용되면, 이 공간은 정신적 특성으로써 유아에 의해 내면화되는 생산적이고, 상호주관적인 업적이 되며, 그래서 그 아이는 자신과 다른 대상들 사이에 이런 잠재적 공간을 창조할 수 있다. "잠재적 공간 "안에서", "내부"와 "외부"간의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처음에 중간대상들이 나타나고, 그 후에 발달과 내재화, 상징적 놀이를 할 수 있는 역량과 미적 경험이 나타난다.
미학, 인류학, 문학, 연극 같은 영역에서는, 잠재적 공간의 개념을 하나의 모델로써, 또 자체의 발달적 중요성으로도 유용한 것으로 보았다. 시각적 공간, 극장의 환영, liminality, 불신의 유예, 부정적 가능성, 그리고 객관적 상관성 같은 개념들은 위니캇의 잠재적 공간의 어떤 측면들과 비교될 수 있다.

    14. 전조 대상 (precursor object)
아동이 입에 가져가고 자신을 위로할 목적으로 사용하는 어머니에 의해 제공되는 생명이 없는 대상 또는 아동이나 어머니의 신체의 일부분. 이 용어는 원래 위니캇이 제안했지만 Renata Gaddini(1978)에 의해 문헌에 묘사되었다. 아동은 자신의 혀, 머리카락, 손가락, 손, 고무젖꼭지 또는 젖병을 이런 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 Renata Gaddini는 초기 "입으로 들어가는 전조 대상" (예를 들면 고무젖꼭지)과 후에 "피부 접촉과 촉감 전조 대상"(예를 들면, 곰 인형)을 구별했다. 후자는 중간 대상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역할을 수행한다. 건강한 발달과정에서, 입으로 가져가는 대상은 점차적으로 중간대상이 되는 촉감적 대상을 좋아하게 되면서 포기된다. 전조 대상에 관한 발달상의 문제는 매우 초기의 정신 신체적 문제, 유아기 복통(colic), 유아기 천식, 반추(rumination)같은 것을 포함할 수도 있다. 이런 대상들이 이런 대상들을 포함하는 특정 발달상의 어려움을 둘러싼 병리의 수준을 결정하는데 사용되는 동안 전조대상은 전 상징적, 감각 운동적, 신체 정신적 단계를 제안한다.

      15. 일차적 창조성 (primary creativity)
아동의 창조적 역량의 초기 표명과 일차적 기원. 일차적 창조성은 세상을 창조적인 방법으로 보고, 놀이 할 수 있는 결정적 역량을 말한다. 이 용어는 천재나 예술가의 창조적 과정보다는 일상생활에서의 창조성을 말한다.
창조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역량을 위한 기본 모델은 충분히 좋은 엄마에 의해 제시된 객관적 세계 안에서의 유아의 경험이다. 유아는 대상이 거기에 없지만 자신이 그것을 창조한다는 느낌을 즐길 수 있다. 이런 문제시되지 않는 원시적unchallenged primitive 환영은 이후에, 불신의 유예를 위한 역량인 경험하는 것의 주관적 양식의 사용과 진정한 놀이를 포함하는 보다 복잡한 자기 상태를 앞선다(precede). 일차적 창조성의 개념으로, 위니캇은 발달적 노선(line)의 시작을 묘사한다.

    16. 일차 모성 몰두 (primary maternal preoccupation)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서부터 시작하여 분만 후 몇 주 동안 지속되는 모성적 마음의 상태로, 이 때 어머니는 유아에 깊이 사로잡히게(preoccupied)된다. 어머니는 아기가 없다면 병리적 철수로 간주될 수 있을 정도로 외부 세계에 무관심하다. 그러나 모성적 몰두는 적응적인 철수로, 유아에게 태아기 상태에서 외부 세계로 나오는 과도기(transition)를 제공하기 위해 필요한 "건강한 질병"이다. 어머니는 안정성, 항상성, 그리고 "존재의 연속성"에 대한 원시적인 느낌(primordial sense)을 주는 "안아주는" 또는 "환경적" 어머니이다. 그녀는 욕동이 아니라 필요(needs)에 만족하게 되는데, 위니캇에 따르면 욕동은 이 단계의 유아 발달에 조직화된 실체(entity)가 아직 아니기 때문이다.

      17. 스퀴글 놀이 (squiggle game)
위니캇에 의해 고안된 짧고, 평가적이고, 치료적인 아동과의 접촉. 치료사는 단순한 선을 그리고 아동은 거기에 덧붙여 그림을 계속 그린다. 이 놀이는 자유로운 놀이와 연상의 측면을 결합하고 아동이 자유롭게 치료사와의 관계를 확립하게 한다. 상호작용의 느낌은 상호적으로 건설적인 것이다. 스퀴글 놀이는 아동과 성인 분석 및 심리치료에서 이미지를 해석적으로 사용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정신분석적 과정의 구조적(constructivist), 발달적 견해를 간직하고 있다.

    19. 중간대상, 중간 현상 (transitional object, transitional phenomenon)
중간대상은 유아가 처음으로 생명이 없지만 소중한 "내가 아닌" 어떤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일반적으로 작고 부드러운 담요나 장난감). 아이는 이것을 스트레스 상황, 종종 잠자러 갈 때 일차적 사랑 대상으로부터의 감정적 분리 과정으로 사용한다(Winnicott, 1953). 중간 대상은 종종 어머니를 생각나게 하는 특징적 냄새와 느낌 생각을 가진다. 어머니가 옆에 없을 때 이것은 위안을 주고 안정을 주는 어머니의 환영을 보존한다. 이것은 걸음마 아기에게 자율성을 증진시킨다. 왜냐하면 엄마는 자신의 통제아래 있지 않지만 중간 대상은 자신의 통제 아래 있기 때문이다. 원대상(original object)은 두 살에서 4살 경에 포기되지만, 이후에 장난감들은 계속적으로 위안을 준다.
위니캇은 중간 현상을 보다 광범위하게 정의했다. 중간대상은 소리―유아의 옹알이나 잠들게 하는 노래―또는 외부 현실에 속하는 것으로 완전히 인식되지 않은 물질 대상들을 포함한다. 원(original) 사랑 대상에 대한 대체에 의해 이런 소리나 대상들은 과도기 적이고(transient), 리비도가 과도하게 집중되게 되고(hypercathected), 과도하게 상징화되는(hypersymbolized) 어머니의 대체로써 삶의 후반기에 기능 한다. 그것들은 자기 충족적인 느낌과 대상 상실과 유기에 대한 느낌을 없애준다. 그것들은 사랑을 주고, 위로를 주고, 안정을 주는 엄마의 환영을 보존할 필요라는 대상관계 딜레마를 해결하려는 자아의 시도를 가리킨다. 이전에 확립된 대상 항상성과 사랑에 의문이 제기될 때, 자아의 특질과 기능들 그리고 특별한 항목들과 활동들은 걸음마 시기에 담요나 그와 유사한 과도하게 리비도가 집중된(hypercathected) 대상에 대한 배타적인 소유에 중심이 된 자아 현상의 일반화로써 나타날 수 있다. 원 중간 대상의 파생물은 초기 청소년기에 보여진다(Downey, 1978). 10대들의 놀이 양식, 음악, 의상, 영화에 대한 관심과 빠르게 변하는 다양한 "중요한" 창조적 활동들에 몰두하는 것은 중간 대상 현상을 구성한다.
이런 대상들이나 경험들은 자기와 대상 표상들이 오직 부분적으로만 분리되고 분화된 발달 시기에 어머니와 공생의 환영을 불러일으킨다. 중간 대상들과 현상은 "나"와 "내가 아닌 것" 모두로 보인다. 아니면 반대적인 관점에서, "내가 아니고" 그리고 "내가 아닌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들은 비교적 유동적인 자기와 변하는 현실간의 역동적 균형을 가리키는 방법인 중간 과정(Rose, 1978)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의 결정체이다. 이 과정은 또한 내적 그리고 외적 세계간의 상호작용으로 보일 수 있고(위니캇의 "중간 영역intermediate area"), 일차 과정과 2차 과정간의 상호작용으로 보일 수도 있다. 중간 대상과 현상은 이 과정의 외적 표명이다. 그들은 분리-개별화의 과정을 위한 정신 조직자(organizers)로써 기능 할 수 있다(Netcalf and Spitz, 1978); 그것들은 양가 감정적으로 경험되어진 어머니에 대한 조정을 촉진시킬 수 있다; 그것들은 자기와 세계 간에 경계를 구분하는 것을 도울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스트레스 상황과 잠을 자는 동안에 보다 쉽게 부서지고 보다 쉽게 퇴행되는 신체 이미지를 지지해 줄 수 있다.
중간 대상이 종종 충분히 좋지 않은 보살핌의 결과로써 필수적으로 일어날 때(obligatory), 그들은 물품음란증적(fetishistic) 특질을 취한다. 이 때, 중간대상은 더 이상 건강하지 않고, 발달을 촉진하지 않으며, 자아, 자기, 또는 신체 이미지에 "상처를 남기게"(Greenacre, 1969, 1970) 된다. 그러나 중간 대상 또는 현상이 병리적으로 될 때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다. 어떤 학자들은 자기와 대상 항상성 도중에 있는 말러의 분리-개별화의 마지막 단계 이후의 시기로 그들의 개념적 사용을 제한한다. 만약 중간 대상과 현상이 그 시기 이후에도 계속 지속된다면, 물품음란증적으로(fetishistic) 가게 된다. 그러나 위니캇의 개념은 이것보다는 더 넓다; 이것은 평가하기가 어렵다. 확실히 많은 아동들이 이런 대상과 현상을 자신들의 10대 초기에 잘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 개념은 상징적 대상들도 중간적이라고 불리는 식으로, 너무 일반적으로 적용되지는 말아야 한다.


"정신분석 용어사전" 중에서...
- "PSYCHOANAYSIS" -the major concepts
Burness E.Moore,M.D.and Bern D. Fine, M.D. 공저
Yale University Press (New Haven and London)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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