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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이론

Melanie Klein (1882-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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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연구소 작성일06-04-16 21:00 조회2,6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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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클라인은 어린이와 유아에게서 목격했던 분노와 증오의 위기들(crises)에 대해 숙고했다. 이 위기들은 많은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공격성의 한 가닥이 항문기와 소변기 충동으로부터 나오는데 이것은 위험한 물질(배설물)을 자기 바깥으로 축출하여 어머니 안으로 집어 넣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 해로운 배설물과 함께, 증오심과 함께 내쫓긴 자아의 분리된 부분들 또한 어머니에게 또는 어머니 내부로 투사된다. 이 배설물과 나쁜 자기의 부분들은 대상에 상처를 입힐 뿐 아니라 대상을 조종하고 대상의 소유물을 빼앗는다.

클라인은 이런 현상을 ‘투사적 동일시’라고 불렀다. 앞에서 제시된 스키조이드 환자와 정신병 환자의 많은 예들은 이 현상을 가리키고 있다. 예를 들면, 광범위하게 확장된 남자의 사례(p. 105)에서 환자는 그의 인격 혹은 자기가 자신의 분리된 부분들을 나타내는 많은 외적 대상들로 ‘광범위하게 확장되는’ 것으로 느꼈는데, 그 때 외적 대상들은 자신의 각 부분들을 의미한다. 그 과정에서 그의 정신은 공격당하고, 손상을 입거나 혹은 분열되었다. 그리고 그 부분들은 환상속에서 투사에 의해 다루어졌다.
클라인은 이것을 아주 초기의 공격적 관계의 원형으로 서술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자기의 나쁜 부분들을 가지고 있는 한, 그녀는 독립된 개인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나쁜 자기로 느껴진다(클라인, 1946, p. 8). 이들 재배치된 자아 부분에 대한 환상들은 항문기 충동, 즉 배설물의 배출과 관련된다. 그러나 유아에게 있어서 그것들은 실제로 일어나는, 실재하는 무의식적 환상들이다. 유아는 그것들을 전적으로 믿는다. 실제로 유아의 부분은 자아 경계의 외부에 있는 어떤 다른 대상 안에, 즉 외적 대상 안에 있다. 그 때 거기에는 특별한 정체성이 존재한다. 어떤 점에서 유아는 외적 대상이다. 그러나 대상(그의 어머니)은 단순히 유아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유아의 일부분이다.
이 믿음들이 결정적으로 중요해진다. 주체는 그 부분을 상실했다―그때 자신의 감정을 잃어버린 남자와 필요한 자신의 능력을 상실한 여자의 사례에서처럼 그 또는 그녀는 실제로 고갈되었다고 느낀다(pp. 99, 101)―고 믿거나 혹은 외적 대상이 자기의 부분으로 경험되고 그리고 자기에게 합병되었다(확장된 남자)고 믿는다. 실제 관계 상황에 영향을 미칠 만큼 그렇게 강하다고 믿는 환상들은 ‘전능’이라고 불린다. 이 환상들은 외적 대상이 내적 대상으로서 신체적으로 자리잡는 것으로 느끼는 ‘전능’환상들의 짝이다(5장을 보라). 이 환상 과정들은 종종 많은 공격성의 표출과 함께 발생한다. 그리고 그 환상에 대한 믿음의 강도가 마치 그러한 공격성의 구체적 표현이 실제로 현실 속에서 있었던 것처럼 대상을 두려워하게 하는 요인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종류의 경험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 느낌은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클라인은 이 경험들을 이해하고, 말로 표현하고 그리고 소통하는 것에 대해 아주 비관적이다. 왜냐하면 환상들은 아직 유아가 언어를 사용하여 생각하기 이전에 발생하므로, 그러한 원시적인 과정을 묘사하는 것이 아주 어렵기 때문이다(클라인, 1946, p. 8, 각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목적은 이 경험들에 관한 어떤 개념을 제공하는 것; 혹은 적어도 어떻게 정신분석가가 그것들에 접근하는가를 서술하는 것이다. 다음 환자의 자료는 정신 내용의 축출 경험(의식 혹은 무의식)을 설명해 준다.
사례: 변기로서의 대상
Herbert Rosenfeld는 정신병 환자, 즉 주기적으로 강렬한 동성애 활동 기간들을 가졌던 편집증 환자에 대해 말한다:
…아버지의 무릎 위에 신나게 올라탔던 기억이 있는 데, 이 때에 그는 자신의 속옷에 배설하는 환상을 가졌으며, 아버지는 이것을 모르고 있었다. 이 기억이 떠오르기 이전에 그는 종종 자신의 정신 안에 있는 어떤 사고와 감정들에 관해 염려와 우울한 감정을 자주 느꼈다. 
나는 이 사례를 항문기 기능, 즉 배변과 관련된 심리적 활동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로 선택했다; 아버지의 무릎이 마치 변기였던 것과 관련된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정신 안에서 해방감을 느끼고 흥분을 느꼈다고 나에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한 것이었다.
그 연결 관계―분석가에게 말로 자신을 표현하는 해방과 어린 시절 아버지의 무릎에다 배설물을 내보내는 것 사이―는 자극적인 것이다. 거기에 그의 부분(정신적으로 그의 정신의 부분; 혹은 신체적으로 그의 창자 안에 있는 것)이 실제로 옮겨지는 배출 환상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그가 내 안에 배변하는 것처럼, 나에게 그것을 축출하는 과정(투사)을 통해서 스스로 자신의 우울증으로부터 해방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스스로 이 전이 과정을 항문기 과정에 결부시켰다.
그는 마치 그의 정신의 부분(염려스럽고 우울한 어떤 것)이 화장실에서 배변하듯이 구체적으로 제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환자의 말하기가 화장실에서 그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과 유사한 흥분된 기능을 갖는다:
우리는 또한 명백한 항문기 투사 방어기제와는 별도로, 그는 흥분된 시기 동안 자신의 페니스를 내 안으로 밀어 넣는 성적 환상이 있었다는 것을 인식했다.
우리는 이 남자의 강제적인 침입 환상이 여러 가지 형태―배설물을 아버지/변기로 강제로 밀어 넣기; 분석가에게 말하기, 그리고 언어를 분석가 안으로 밀어 넣기; 그리고 자신의 페니스를 분석가의 항문으로 넣는 자극적인 동성애적 환상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이 기본적 환상의 변형은 이 남자에 있어서 여러 가지 상상적인 형태로 거듭 나타난다.
내가 기술한 방식으로 어떤 정신적인 내용물을 몰아내는 것처럼 보였던 각각의 경우 뒤에, 그는 먼저 흥분이 고조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나중에 박해 불안이 그의 음성에서 드러났다. …그는 자신의 생각 속의 내용물들을 몰아낸 후에 두려워했고, 따라서 내가 시도했던 모든 해석으로부터 거리감을 유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들어가는 환상(투사적 동일시)의 공격적 성질이 그를 두렵게 했고, 그리고 분석가―공격적이고 변과 관련된 어떤 것을 그 안으로 억지로 밀어 넣음으로써―가 그에게 실제로 보복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게 했다; 그리고 그는 해석과 공격적 침범을 구분하지 못했다. 이것은 우리가 친숙하게 아는 바, 클라인이 서술한 두려운 편집적 순환이 되었다(4장); 이 환자 자신의 활동―그것들을 지배하고, 이용하고 비우는―은 그가 그것을 행했던 사람으로부터 똑같은 대우를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다시 나타났다.
Rosenfeld는 바람직하지 못한 자신의 성격 측면들을 다른 사람의 내부에다 버릴 수 있다고 믿는 정신분열환자에 대해 보고했다. 그는 처음에 환자의 성적 느낌에 대한 투사를 서술하지만, 나중에 보다 과격하고 비참한 다음과 같은 종류의 환상에 대해 보고한다.
사례: 대상을 점유하는 것
이 시간에 환자의 감정은 매우 불안한 상태였다. 그리고 종종 다른 사람들이 그녀의 어떤 부분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였다.
이 과정에 대한 간단한 예를 제시하면; 그녀와 가장 친한 친구의 남편인 데니스는 둘째 아기를 출산할 예정인 부인과 떨어져 있는 동안 신경쇠약증에 시달렸다. 그는 나의 환자를 전력을 다해 유혹했다. 처음에 그녀는 그의 접근을 물리치느라고 무척 애를 썼다. 그런데 그를 그의 부인으로부터 빼앗으려는 소원이 곧 의식적 충동으로 나타났다. 그녀는 이 소원을 직접적으로 처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의 모든 불안은 그녀가 그의 소원과 주장들을 통제할 수 있을지에 관한 것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데니스의 주장들을 되풀이하여 말했고, 데니스는 그녀가 대처하기 어려웠던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투사했던 그녀 자신의 탐욕적인 성적 욕구를 상징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Rosenfeld는 그녀가 아직 실제로 데니스의 것이라고 믿는, 데니스의 성적 유혹이 어떻게 환자 자신을 나타내는가를 볼 수 있었다. 특정 정신 상태들(집요한 성적 감정들)이 이 환자의 어려움이었다. 그녀는 그것들(성적 감정들)을 데니스 안에 둠으로써, 거리를 두고 좀더 효과적으로 그것들을 다룰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만일 필요하다면, 그를 회피함으로써 그 감정들 전부를 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때때로 이 환자는 다른―두드러진― 투사적 동일시의 형태를 보여주었다. 우리가 방금 보았던 것처럼, 그녀는 자신의 부분이 분리되어 외적 대상 안에 놓여 있는 것을 경험했다; 그러나 다음 자료에서 그것은 그 이상이었다: 때때로 그녀는 자신 전체를 거기에 두었다. 그것은 기괴하였고 그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분석가에게는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Rosenfeld는 이것에 대한 환자 자신의 경험을 진술한다:
…그녀가 심한 정신병 상태에서 겪은 적이 있다고 전에 말했던 증상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자신보다 12배나 큰 풍선처럼 부풀었다. 동시에 그녀는 자신이 이 풍선 안에 있는 아주 작은 존재라고 느꼈다. 환자는 이 상태를 아주 불쾌한 것으로 묘사했다. 그녀가 나에게 제공한 유일한 실마리는 기대(expectancy)가 그것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녀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혹은 그녀 자신으로부터 어떤 것을 기대하거나 또는 어떤 누군가가 그녀로부터 어떤 것을 원할 때, 이 증상이 심해졌다.
Rosenfeld는 환자가 분석가에 대해 심한 편집 공포를 느꼈을 때, 어떤 특정한 시기와 관련시켜 생각했다고 덧붙여 말했다; 그가 그녀에게 말할 때마다 혹은 그녀에게 말할 것을 기대할 때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그녀 안으로 억지로 밀어 넣는다고 생각했던 시기가 있었다. 욕구가 극단적(성적 욕구의 예에서처럼)이며, 글자 그대로 정신을 날려 버리는 결과를 가지는 것처럼 보였다. 욕구―아직 도달하지 않은 어떤 것을 기대하는 경험―는 이 여성에 의해 담겨질 수 없는 경험들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그녀를 침범하는 것과 침범 당하는 아주 다른―그리고 기괴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이 상담의 시점에서 그녀는 또한 어떻게 그녀가 애인에게 얽매어 있는지를 보다 분명히 의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애인이 외국에 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가 떠나가는 것과 관련된 좌절은 그녀의 탐욕적 공격 욕구를 일으켰다. 그것은 그녀가 원하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데니스에게 그녀의 의지를 강요하는 환상의 형태를 취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는 자신이 데니스 안에 있는 좋은 모든 것을 비워 냈다고 느꼈다. 이 탐욕적인 공격의 결과 그녀는 자신이 데니스 안에 있다고 느꼈다.
우리는 다소 비범한 경험을 상상하도록 요구받는다: 바로 그것은 그녀가 자신의 정신의 부분을 그에게 투사한 것만이 아니라, 그녀가 자신을 위해 데니스 전체를 징발하기 위해서 그녀 자신 전부를 데니스 안에 두었던 것처럼 보였다:
큰 풍선이 갖는 의미는 그녀가 자신을 억지로 밀어 넣었던 대상이 그녀의 구강기적 욕구를 통해서 죽었고, 비워졌고 그리고 그녀의 항문기적 공격을 통해서 공기로 가득 찼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그녀는 대상과의 투사적 동일시를 통해서 죽음을 느꼈다.
Rosenfeld는 이것들이 아무리 환상적인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것들은 환자에게 있어서 실제의 사실들이라고 기술한다. 일단 그녀가 대상 안으로 들어가서 그 내부를 점거하면, 대상에 대한 그녀의 관심은 사실상 대상의 정체성 그 자체가 된다. 이 사례에서 그 정체성은 불안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애인은 탐욕적으로 그를 삼키는 공격 환상에 의해 죽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안에 있고; 그는 죽어 있다.
비록 최후의 산물들―공포, 혹은 죽은 느낌―이 의식에 떠오를 수 있다 하더라도, 이 환상적 믿음들은 의식되지 않으며 숨겨진 무의식적 환상으로 남는다. 이 환상적 믿음들은 의식된 내용이 아니다. 그녀의 이 기괴한 환상들에 대한 Rosenfeld의 해석을 살펴보겠다:
…그녀는 긴 침묵으로 들어갔고, 그때 나는 그녀가 내가 지적한 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드디어 그녀는 다시 말하기 시작했고, 곧 나의 해석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깨달음과 함께, 그녀는 너무 지쳐서 몇 분간 의식을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 혼자 힘으로 다시 그 상태에서 빠져 나왔다. 우리는 이 반응이 나의 해석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고, 이 무의식의 상태와 그녀 자신의 완전한 상실은 내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거기에서 그녀 자신을 상실할 것이라는 두려움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환자의 자기 전체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분석가의 해석은 면담에서 실제로 일어나는―환자가 분석가 안으로 사라지는 것―현상을 통해서 확인된다. 대상 안으로 사라지면서, 그녀는 의식―의미―을 잃었고, 그것은 그녀가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한 것이라고 우리는 이해한다:
자신의 느낌을 상실하는 것과 개성의 상실에 대한 그녀의 당면한 두려움은 스키조이드 붕괴 상태에서 그녀 자신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과 양적인 면에서만 달랐다는 것은 나에게 충격이었다. 만약 자신의 탐욕적 욕구로 인해 그녀가 완전히 다른 대상 안으로 들어갔다고 느꼈을 때, 그녀는 잠이 들거나 혹은 심하게 분열된 상태에 들어갔다. 만약 보다 적은 자기의 부분들이 같은 과정을 거쳤다면 그녀는 여전히 자신에 관한 자각을 보유했고 감정의 상실만이 발생했을 것이다.
Rosenfeld의 환자로부터 우리는 중요한 것을 배웠는데, 투사적 동일시는 정도―그녀 자신의 부분, 혹은 모든 것을 상실하는 것―가 다양하다는 사실이다. 다양한 종류의 투사적 동일시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보다 최근의 클라인 학파의 치료실제의 발전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
투사적 동일시의 또 다른 변용이 클라인의 사례 중 하나에서 나타난다. 다음 사례는 상실된 부분이 멀리 보내지는 거리에 있어서 다양성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이 사례에서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왜곡 정도는 근저에 있는 환상의 난폭성 정도에 비례한다.
사례: 자신의 공격성을 분리시킨 남자
클라인의 환자는 꿈꾸는 동안 투사적 동일시의 정도를 완화시켰다.
…그는 다음의 꿈을 보고했는데, 그 꿈은 정신의 통합과정에서 발생하는 우울 불안의 고통으로 인한 변동들을 보여준다. 그는 2층에서 있었는데 그의 친구의 친구인 ‘X'가 길에서 함께 산책하자고 그를 부르고 있었다.
당신은 꿈꾸는 자 자신의 그리고 환자 인격의 부분―분리되고 버려진 그리고 자신의 경계밖에(길거리에) 두었던 부분―의 일반적 표상인 친구의 친구에 친숙할 것이다. 산책에 초대한 것은 이 두 부분의 통합을 향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환자는 ‘X’와 함께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파트에서 검은 개가 튀어 나와 차에 치일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개를 쓰다듬었다. 그가 창 밖을 보았을 때, ‘X’가 멀어지고 있었다.
만약 당신이 내가 제시했던 상징적 의미를 인정한다면, 그때 꿈에서 시도했던 통합은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환자의 한 부분인 ‘X’는 그 자체를 보다 멀리 이동시켰다―투사가 증가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분리된 이 인격의 부분들은 무엇인가? 그리고 왜 그들은 꿈속에서 더 멀어지게 되었는가(‘X’가 멀어진 것)? 클라인은 환자가 개 그리고 또한 고양이를 분석가와 관련시켜 생객했던 연상 내용들을 보고했다. 그녀는 계속 말했다:
…개-고양이―분석가―에 대한 위험은 그녀가 X에 의해 덮쳐지는 것(말하자면 상처 입음)에 대한 위험이다. 개-고양이의 안전에 대한 환자의 관심은 X에 의해 표현되었고, 그리고 이미 부분적으로 치유되었던 분리를 일시적으로 확장시켰던, 그 자신의 적대적이고 탐욕적인 성향에 대해서 분석가를 보호하려는 소원을 나타냈다.
클라인은 X가 환자의 공격성, 특히 분석가를 향한 환자의 공격성을 나타낸다고 추론했다. 그때 분석가를 보호하기 위해서(그리고 그것은 그가 내부에 담고 다니는-아파트 안에 있는- 분석가이다), 그는 사랑의 감정―개를 쓰다듬는 것―을 사용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는 그의 공격성을 보다 크게 분리시켜야만 한다(거리가 멀어지는 X).
먼 곳으로 공격성을 이동시키는 것은 비록 환자의 행동이 덜 공격적일지라도 정신 장애의 심화를 의미한다. 환자의 입장에서 공격 충동을 상실하는 것이 매우 유익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분리는 정신에 대한 해로움 그 자체이다. 환자는 그가 회복하지 못할지도 모르는 실로 압도적인 어떤 것 때문에, 더 정확히 말하면, 대상이 공격을 살아남지 못할지 모른다는 것 때문에, 자신의 공격성을 두려워한다. 이런 식으로 그것(공격성)을 멀리 보내는 것은 대상에 대한 보호일 수 있고, 또한 환자에 대한 보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신의 극단적 분리를 가져오기 때문에, 그것은 개인의 통전성에 해롭다. 이 사례를 요약해 보면: 환자는 자신의 파괴성을 자신과 분리시킴(그것을 그 자신으로 부르는 것 대신에 ‘X’로 부름)으로써 다룬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자신 바깥(아파트 밖)으로 투사했다. 그가 그것(X가 산책에 초대한 것)을 언뜻 보았을 때, 그는 자신의 파괴성 때문에 두려워졌다. 게다가 자신이 분석가를 상처 입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느꼈다. 분석가를 차로 칠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그녀를 사랑한다(개를 쓰다듬음)고 자신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그녀와 그의 사랑의 감정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파괴성을 보다 멀리 투사했다(X를 보냄).
투사적 동일시는 다양한 방법을 사용한다; 그것은 모든 무의식적 환상 전체와 관련된다. 그리고 그것은 분열, 폭력적이고 전능한 분리의 다양한 정도 및 그것의 다양한 의도와 관련된다. 내적 세계에 대한 깨달음과 존경심을 갖는다는 것은 정신과정에서 폭력성의 정도가 줄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분리가 보다 적을수록, 친구의 친구인 X의 정체성에 대해 보다 많이 인식한다. 이 사례에서 투사적 동일시는 덜 공격적이다. 그것은 우리가 논의했던, 앞의 사례에서 알 수 있는 아주 난폭한 제거와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속에서 분명히 묘사된, 자기의 안이 아니라 바깥에 자리잡고 있는 환자의 부분은 여전히 결정적으로 분열과 투사적 동일시 과정이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꿈의 시작 부분에서 ‘X'가 주체에 접근하고 그리고 산책으로 초대하는 것은 인격 통합의 시작을 암시한다; 그것은 억압과 같은 새로운 배치를 향한 이동을 가리킨다. 그 억압 안에서 부분들이 함께 살기 시작할 것이다. 클라인의 용어에서 성격이 발달할 때, 투사적 동일시의 성질이 변화한다. 폭력적 투사적 동일시 형태가 완화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어떻게 그것이 우울적 자리를 향한 이동과 관련되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최근 클라인 학파 정신분석의 주요한 발달 과제의 하나가 되었다.
환상이 지닌 폭력성의 정도의 변화와 관련해서, 투사적 동일시를 위한 수많은 동기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완전한 목록은 아직 수집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얼마의 일반적인 범주들을 확일할 수 있다: 즉 감당할 수 없는 경험의 방출; 감당하기 어려운 정신 기능과 원하지 않는 것, 특히 현실의 어떤 것을 나타내는 것들을 없애버리는 것; 대상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방어―혹은 투사된 것이 실제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에 대한 방어―의 결과로 대상이 침범 당하고 점유되는 것; 타자들의 정신에 대한 통제를 지속함으로써 전능 경험을 유지하는 것 등이다. 그밖에도 자기의 좋은 부분들을 그들이 보다 안전할 수도 있는 대상 안으로 투사하는 것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최근 클라인 연구와 치료 실제에서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는, 특별한 신뢰를 제공하는 환경, 즉 ‘담아 주는’경험을 제공하는 의사 소통으로서의 투사적 동일시 형태가 있다.
투사적 동일시와 의사 소통
1950년대에 몇몇 클라인 분석가들은 파괴와 공격성과는 별로 관련성이 없는 투사적 동일시의 형태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 장의 앞의 사례에서 다루었던 투사적 동일시들과 다른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
사례: 이해하지 못하는 어머니
비온은 생생하게 재구성된 몇 개의 사례들을 요약했다.
분석적 상황은 내 생각에 아주 초기 장면의 느낌을 갖게 했다. 나는 환자가 유아기에 유아의 정서적 표현에 의무적으로 반응했던 어머니를 목격했다고 느꼈다. 의무적인 반응은 그것 안에 참을 수 없음의 요소 ‘나는 어린아이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쩔쩔매며 아기의 상태를 이해하지 못한 어머니를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특별히 그와 같은 어머니에 대한 아기의 경험을 숙고해야만 한다.
나의 추론은 아기가 원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어머니는 유아의 울음을 그녀의 현존에 대한 요구 이상으로 취급해야 한다. 유아의 입장에서 볼 때, 어머니는 아이를 자신 안에 받아들여야 하고 그래서 아이가 죽어 간다는 두려움을 경험해야 한다.
여기에서 어머니는 아기가 내사를 위해 필요한 인격이며 아기가 투사한 부분을 알아주는 자로서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기가 스스로 담을 수 없는 것은 이 두려움이다. 그는 두려움을 인격의 부분과 함께 분열시키고, 어머니 안으로 투사하려고 노력한다. 이해해 주는 어머니는 투사적 동일시를 통해 아기가 다루고자 하는 공포 감정을 경험할 수 있으면서도 균형된 관점을 유지한다.
환자는 투사적 동일시―의사 소통의 형태로서의―에 특별한 역할을 부여한다. 그것은 단순히 축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투사적 동일시는 일종의 의미를 지닐 수 있고, 어머니는 그 의미를 이해할 것으로 기대된다. 투사적 동일시가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어떤 비움의 기능을 수행한다. 어머니는 이 어려움에 직면한다: 어머니는 아기가 견딜 수 없고 비울 필요가 있는 어떤 것에 대한 투사적 동일시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에 의해 압도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항상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이 환자는 그러한 감정들을 경험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고 그것들의 진입을 부정하거나, 혹은 아기의 감정을 내사함으로써 불안의 희생물이 되는 것으로 반응(reacted)했던 어머니를 다루어야 했다.
우리는 정신분석에서 이와 비슷한 상황이 발생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심리분석가 역시 환자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담아 주어야 할 것이다. 환자는 그 자신 혹은 그녀 자신의 투사된 부분을 감당하는 대상을 경험하고자 노력한다. 이것은 단순한 축출적인 투사인 비움을 능가하는 경험이다. 이런 식으로 그들의 불안과 씨름한 어머니(그리고 정신분석가)에 관한 환자의 환상, 그리고 그것들에 기초하여 특별한 활동을 수행하는 어머니/분석가에 대한 환자의 동경은 증오하는 외적 대상에 대한 정신의 부분들의 파괴를 강요하는 무절제한 공격성과는 아주 다르다(시력을 상실한 남자의 사례와 변기로서의 대상 사례를 보라, pp. 109, 120).
투사적 동일시는 종종 타자의 인격에 어떤 충격을 준다. 예를 들면, 아기가 울 때, 어머니는 즉시 긴장한다. 그녀는 놀라면서 그 울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판단한다. 그리고 그때 울음이 의미하는 욕구 혹은 무드가 무엇이든 그것에 대처하기 위해 노력한다. 어머니가 종종 유아 안에 있는 공황불안을 느낀다고 해도 그것은 과장된 말이 아니다; 그때 그녀는 그녀 자신 안에서 생겨나는 공황불안의 느낌을 가지고 그 상황에 직면해야만 한다. 정말로, 어떻게 어머니가 이런 식으로 아기에게 맞출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신비이다; 아기의 울음에 대한 반응에는 선천적이며 생물학적인 어떤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우리는 버스를 기다리는 행렬에서 혹은 가게 안에서 우는 아기가 있을 때 함께 불안해하는 사람의 모습을 본다.
물론, 우리가 7장에서 보았던 비움의 형태에서처럼, 그것이 이러한 목적들을 위해 어머니 안으로 혹은 분석가 안으로 투사할 때, 거기에는 아직 환자의 정신(혹은 유아의 정신)의 분열작용이 있다. 그것은 여전히 자아에 대한 공격성, 자아의 부분을 분시켜 그것을 외적 대상 안으로 투사하는 것을 수반한다. 또한 우리가 다음의 비온의 사례들에서 보게 될, 이러한 종류의 투사의 힘 역시 매우 난폭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중에 마지막 사례는, 투사적 동일시가 의미 형성의 원시적 방법, 혹은 의미 형성을 위해 어머니의 정신의 도움을 불러내는 원초적 방법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것은 생각의 잠재력, 그리고 그 능력을 생성시키는 잠재력을 포함한다. 정신분석은 함께 의사 소통의 능력을 회복하고 그 능력을 생생한 상들을 창조하는 상징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포함한다. 때때로 이 능력은 정신분석가의 정신 안에 보존되어 있어야 하며, 환자에게 되돌려질 수 있어야 한다(정신분석가는 그것을 재 투사하고, 환자는 그것을 재 내사한다). 그러한 과정은 담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리고 정신분석 상황 안에서 그것의 형태는 10장에서 연구될 것이다. 담아 주는 것에 대한 비온의 개념은 연결하는 것에 관한 그의 생각에 대한 정교화의 하나이다(7장을 보시오). 담아 주는 사람과 담겨진 사람 사이의 연결은 하나가 다른 것 안으로 들어간―여러 종류의 정서적 특색, 그리고 정서적 결과와 함께― 결과이다. 담아 주는 것은 어머니와 아기, 혹은 분석가와 환자 사이의 연결을 포함한다; 그것은 또한 여성과 남성 사이의 활동과 분명히 관련된다.
담아 주기
환자의 의도는 그의 마음에 있는 부분들을 분석가의 마음에 투사하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그것들이 거기에 충분한 기간동안 머무를 수 있다면 그것들은 분석가의 정신에 의해 수정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안전하게 내사될 수 있을 것이다(Bion, 1959, p. 103). 이것은 상당히 확장된 환상이며, 그것은 하나의 외적 대상을 포함한다: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 경험을 수정해 줄 수 있는 사람; 그 경험들은 일단 수정되면 재 내사될 수 있다. 그리하여 두개의 다른 환상 집단이 두 종류의 다른 투사적 동일시에 관련된다. 거친 축출의 형태로 내보내진 마음의 부분은 무의미한 것이며 전적으로 거부된 것이다; 대상의 상태는 고려되지 않는다. 다른 한편 의사 소통이 가능한 형태의 특수한 질적 요소들이 있다: 기꺼이 전능을 포기하고자 하는 요소, 그리고 어느 정도 특정 기능들을 수행할 수 있는 대상에 의존하는 것을 허락하고자 하는 요소가 그것이다.
비온은 이 의사 소통이 가능한 환상이 때때로 실패할 수도 있음(앞에서의 경우처럼)을 알게 되었다 - 대상은 항상 그 환자의 부분이 내면에 충분한 기간동안 머물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환자는 대상(분석가)이 불안을 담아 주고 환자를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수정해 주기 위해서, 이 정신 기제를 사용하도록 허용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예민하게 알고 있다.
사례: 속임 당한 환자
앞의 사례에서 다룬 비온의 환자는 그가 투사적 동일시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그가 충분히 사용할 수 없었던 정신 기제였다고 끈질기게 암시했으므로; 분석은 그에게 그가 속임 당했던 정신 기제의 활용을 위한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나는 이 인상에만 의존할 필요는 없었다. 환자 자신의 인격이 감당하기에 너무 강력하게 느껴지는 죽음의 공포를 제거하고자 노력했을 때, 그는 그 공포를 분리하여 내 안에 집어넣었다. 이 생각은 만약 그것들이 거기에 충분히 오랫동안 머무르도록 허용되었다면, 그것들은 나의 정신에 의해 수정되었을 것이고 그러면 안전하게 재 내사되었을 것이 명백하다. 때때로 나는 환자가 느꼈던 것을 내 마음에 가지는데 …나는 그것들을 나는 재빠르게 비움으로 해서 그 감정들은 수정되지 못하고 더 고통스러워진다.
만약 대상―분석가 또는 어머니―이 이런 존재 상태를 허용하고 감당해 주지 않으면 불행한 일들이 발생한다:
따라서 그는 더욱 절박하고 폭력적으로 그것들을 내게 강요했다. 그의 행동은 분석 상황을 떠나서 본다면 일차적 공격성의 표현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의 투사적 동일시의 환상들이 폭력적일 수록 나에 대한 그의 두려움은 더해 갔다. 면담 중에 이유 없는 공격성이 표현되는 행동이 나타나는 경우들도 있었다.
이 투사적 동일시의 등장은 단지 공격적으로만 보이지만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거기에는 이해해 주는 대상을 찾는 요구가 있다:
…나는 그것들이 환자를 다른 빛에서, 즉 그의 폭력적인 반응이 나의 적대적인 방어에 대한 그의 느낌이라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해 주었기 때문에 이 사례들을 인용한다.
담아 주는 사람의 실패는 정신 발달에 있어서 잘못된 많은 경우들에 대한 이유가 된다. 그것은 무반응한 대상에 직면해서 촉발되는 공격성의 근원일 수도 있다. 분석가는 이 좌절로 인한 공격성―환자의 투사를 받지 못하는 그 또는 그녀 자신의 실패―을 공격할 것을 찾는 공격성과 주의 깊게 구분해야 한다.
사례: 담아 내는 데 실패한 환자
다음 사례에서 비온은 자신의 부분들이 수용되고 있는지 어떤지에 대해 민감한 또 다른 환자에 대해서 기술한다:
그 면담은 …날씨가 덥다, 자신이 탔던 기차가 만원이었다, 그리고 그 날이 수요일이었다 등의 서너 가지 사실을 말하면서 시작되었다. 이것이 삼십 분이나 걸렸다. 이것에 대해 알아보았을 때, 그는 자신이 미칠 것 같아 두렵다고 말했으며, 이것은 그가 현실과의 접촉을 유지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인상을 확인해 주었다.
비록 정신분열환자의 말같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 별 의미 없는 말들이 오고 갔다. 그러나 실제로 환자는 미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집착했다. 그의 절망이 점점 더 커졌다:
잠시 후 그는 내가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가 나를 나쁘다고 느끼고 있으며, 그가 내게 집어넣고 싶어하는 것을 내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느끼고 있다고 해석했다.
비온은 그의 설명에 덧붙여서, 이 해석은 지난번 면담 자료에 의해 안내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 때 환자는 해석들이란 자신이 분석가 안에 집어넣기를 원했던 감정들을 축출시키고자 하는 시도라고 느꼈다.
내가 의도적으로 이와 같이 해석한 것은, 지난번 면담에서 그가 나의 해석을 나에게 집어넣기를 원했던 자신의 감정들에 대한 축출 시도로 느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내 해석에 대한 그의 반응은 두 개의 개연성의 구름이 면담 공간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그 반응이 나의 해석에 대한 확인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분명히 분석가는 그 개연성의 구름은 바로 그가 마음속에 그렸던 그림―환자 주위의 공기 안으로 배출시켜 버린 분석가에 대한 환자의 불확실성(개연성)의 남은 부스러기―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분석가는 이 의미(환자의 불확실성)룰 재구성하려고 시도했다:
나는 그가 나의 나쁨을 제거하고자 시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석했다. 그것은 그가 내가 정말로 나쁜지 또는 그의 내부로부터 나온 어떤 나쁜 것인지 알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나는 말했다. …나는 그 환자가 자신이 환각 안에 있는지 아닌지를 확실히 알려고 시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분석가는 되어진 말들의 전후 관계를 통해서 충분한 의미를 재구성하는데 성공했다. 나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환자는 미칠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는 그 두려움의 불확실성을 감당할 수가 없었기에 그것을 파편화시켰고, 마찬가지로 그가 불확실하게 느꼈던 대상을 파편화시켰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것과 불확실성(개연성)을 인식할 수 있었던 그의 정신의 한 부분을 배출시켰다; 나아가 그는 이번에는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그를 담아 주고 이해하는 데) 그의 내면에 있어야 할 대상의 파괴를 경험했다:
분석 안에서 반복되는 이 불안은 이해의 능력에 대한 그의 질시와 증오가 좋고 이해심 있는 대상을 파괴하고 그것을 축출하는 데로 인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연관되어 있었다.
면담 사례에서부터 가져온 이와 같은 자료가 보여주는 것은, 안전감과 정신적 안정의 기초가 되는 좋은 내적 대상(좋은 대상과의 동일시를 보라. p. 71)이 하나의 특수한 기능―외적인 어머니 또는 분석가가 그렇게 하듯이 정서 상태를 담아 주는―을 가지며, 그 내적 대상은 어머니 또는 분석가의 정서 상태를 내사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이 경우 질시로부터 유래하는 파괴적 환상은 내면화된 담아 주는 대상에 손상을 입힘으로써 산산조각이 나는 불안에로 인도한다. 이것은 접근이 불가능함으로써 생기는 좌절과 다른 공격성이다. 그러나 환자가 그의 손상된 내적 대상(내면에 있는 담아주는 대상)을 투사한다면, 그는 외적인 담아주는 대상이 실제로 실패를 했는지 아니면 그가 단지 자신의 내적 대상의 상태를 투사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알 수가 없다. 이제 주어진 실제의 해석은 분석가에 대한 환자의 의심에 관한 것이다. 이 어려움이 분석가에 의해서 해석을 통하여 이해되고 수용된다―담겨진다.
이름 없는 불안
투사적 동일시의 거절은 이미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환자에게는 심각한 장애를 가져다준다:
만약 투사가 어머니에 의해 수용되지 않으면 유아는 자신이 죽어 가고 있다고 느끼며 동시에 그 죽음의 의미를 벗겨 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감당할 수 있게 된 죽음의 공포가 아니라 이름 없는 불안을 재 내사하다 한다(비온, 1962a, p. 116).
이 과정에서 비온은 의미를 더해 주거나 회복시켜 주는 대신 의미를 벗겨 버리는 특별히 박해적 대상―기괴한 대상―을 서술한다.
하나의 내적 정신 과정인 투사적 동일시는 역시 하나의 내적 정신세계를 지닌 다른 사람들과 정서적인 접촉을 하는데 있어서 중심적이고 필수적인 요소인 듯하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하나의 의사 소통의 형태로 기능 하는 데 그 의사 소통은 비상징적인―언어 이전의 것이라는 의미뿐만이 아니라 상징 이전의 것이라는 의미에서― 형태이다. 유아기의 아주 초기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발생하는 것은 이미 유아가 대상이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정신적 삶이 시작되면, 그것은 전적으로 정신적인 기초를 갖고 있으며 모든 것이 마음에 있다는 사실을 지시하는 듯하다. 구체적이고 신체적인 실재는 나중에 알게 되는 것으로 발전한다. 이것은 정신 발달에 대한 보다 일반적인 개념들을 혼동시킨다. 일반적인 개념은 신체적 지각의 초기 단계로부터 훨씬 후의 더 성숙한 단계의 다른 정신들에 대한 감수성에로 발달한다는 것이다(물론 이 단계에서는 신생아 정신이 지닌 실제의 성질에 대하여 불가지론적인 입장을 유지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만약 투사적 동일시가 축출로부터 의사 소통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면, 긍정적인 방향의 맨 끝에는 공감, 또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는’ 행동 밑에 있는 투사적 동일시의 형태가 있다. 공감이 주체나 대상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왜곡 없이 발생한다. 이 경우 원시적 형태의 폭력성은 많이 완화되어 사랑과 관심의 충동에 의해 통제된다. 물론, 어떤 경우에―또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공감적 질문이 침범으로 느껴질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만약 질문을 받는 대상이 비협조적이라면 그 공감적 질문은 의도적인 침범으로 변할 수 있다. 투사적 동일시의 형태가 성숙해 가는 과정은 다음과 같이 하나의 연속성으로 요약될 수 있다:
―. 공격적 관계를 보여주는 폭력적인 원형
―. 다른 정신과 의사 소통을 원하는 보다 호의적 형태
―. 공감, 또는 누군가의 정신 안에 그를 이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비폭력적으로 들어가는 것
이 연속되는 과정은 이것이 우울적 자리 그리고 관심의 능력의 성취와 평행적으로 나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울적 자리와 관심의 능력의 성취 이 두 단계들은 물론 연결되어 있다.
다음 장에서 나는 지금까지 다른 많은 사례들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공격성의 매우 초기적 변동에 관련된 클라인의 마지막 중요한 발견을 살펴보겠다. 그리고 이 공격성이 점차적으로 사랑 충동에 의해 변화되고 사랑에 젖어 들게 되는 과정을 다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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